국내여행/충청남도

태안의 독립운동가 이종일선생 생가지

여주데이지 2011. 6. 8. 15:00

20년전 태안에서 30개월정도 살았었고 그후에도 매년 태안을 다녀 갔지만

늘 다니던곳만 반복해서 다녀서 원북면쪽으로는 처음 이네요.

이곳에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그자리에서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것을 승락하고

독립선언서 원고를 스스로 조판 .교정.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한후

기미년 3.1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여 3년간 '한국독립비사'를 집필하신

옥파 이종일선생의 생가가 있다고 해서 들려보았습니다.

 

 

1858년 11월6일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번지에서 태어나신 애국지사 이종일선생은

 충청남도 태안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여 1873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개화파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일본에 갈 때 수행하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 문물을 직접 보고 온 것 또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대한황성신문》 사장을 맡아 언론계에서 활동했고,

독립협회대한자강회에 참가하고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개화 사상에 기반한 계몽 운동에 활발히 나섰다.

1906년 손병희를 통해 천도교에 입교한 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이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 사장을 맡고 있던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거사 열흘 전부터 비밀리에 인쇄한 것이다. 당시 보성사는 최신식 인쇄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종일은 이곳에서 천도교의 월보(月報)를 펴내고 있었다.

이종일은 거사의 핵심중 하나인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데다 최남선과 함께 이승훈을 통한 기독교 대표들과의 연결 고리를 주선하였다. 이에 따라 공판에서 민족대표 중에서도 주범으로 꼽혀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에는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글맞춤법을 연구한 한글학자이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생가터가 복원되어 있고,[1] 태안의 충애사(忠愛祠)라는 사당에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다음백과)

 

옥파이종일선생동상

 

 

 

1996년 생가 뒷편에 있던 사당을

현위치에 이전 건립한 것으로 옥파이종일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곳 입니다.

 

 

 

 

 

옥파이종일선생께서 태어나신 집으로 독립운동의 터전 이었고

1986년 복원후 1990년 12월 31일 도정기념물 제85호로 지정 되었다고 합니다.

 

 

 

 

 

 

 

 

 

 

 

 

 

 

 

 

 

 

 

사적비,기념관과 전시실이 있는데 사진을 못 찍었네요.

다음에 가면 자세히 보고 와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