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전라남도

남도답사일번지 강진여행- 실학사상의 산실 "다산초당"

여주데이지 2009. 8. 28. 12:37

다산 정약용 선생은 1762년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네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병조참지,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때 서학에 관련 되었다는

혐의로 경상도 영일군 장기현으로 유배 되었다가 다시 황사영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선생은 강진으로 유배 되었다.

유배당시 처음 거처는 강진읍 동성리 동문밖의 주막 뒷방을 빌려 '사의재'라 부르고 1805년 가을까지 생활 하다가 강진읍 뒷산에 위치한

현 고성사인 보은산방으로 거쳐를 옮기고. 그무렵에 명승 혜장을 만나 유불상교의 학문적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806년 강진읍 제자의 집으로 거쳐를 일시 옮긴 후 1808년 봄 이곳 다산초당으로 옯겨와 생활하였다. (강진 군정)

 

 다산유물전시관을 지나 소나무 대나무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한참 올라가면 실학사상의 산실인 다산초당에 이르게 된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어 있는 3개의 오솔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입구에서 초당에 이르는" 뿌리의길"이고 다른 하나는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길"

윤종진 묘 앞에 나 있는 오솔길 역시  다신이 이곳에 머무는동안 마을을 오가며 다녔던 길 이라고 한다.

 

수백년된 소나무 뿌리들이 세월의 흔적을 이야기해 주는것 같았다.

 

 

     윤종진의묘

 

 다산선생 다니시던 오솔길을 지나 조금 더 올라오면 다산초당이 보인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 유배기간중 10여년 동안 생활 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600여권의 책을 저술한 곳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원래 목조초가였는데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되어 없어졌던 것을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그자리에 목조와가로 증건 하였다고 현관에 판각된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목각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붓글씨와 다례체험을 하고있는 회원들

문밖에서 선생님께 절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체험이지만 엄해 보였다.

 

 

 

 

이곳엔 다산초당,동암,서암,천일각등의 건물과 다산사경이라 부르는 정석,약천,다조,연지석가산 등의 유적이 있다.

연지석가산 초당옆에 있는 연뭇은 1808년 봄 다산선생께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만든 연못이라고 한다. 가운데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하고 나무홈통을 이용하여 산속물을 떨어지게 만들어 '비류폭포'하였고 이 연못에 잉어를 길렀다고 한다.

            

                다조 마당앞에 놓여있는 평평한돌로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란 뜻이며 주위에 자생하는 차잎을 따다 그늘에 말린후

                       송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반석이라고 한다.

 

         약천  초당 뒷편에 잇는 샘으로 다산 선생께서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들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 나온다고 한다.

             

         동암  다산동암이란 현판에 판각된 글씨는 다산정약용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천일각  동암에서 조금올라가면 목조건물인 '천일각'이 있는데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 그리며 심회를 달랬던 곳으로

정면과 측면이 한칸씩인 누각이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의 영정, 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기념관 뒤쪽에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다산초당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